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주식 얘기를 하다 보면 요즘 유통주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분위기입니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처럼 AI 관련주가 뜨면서 이마트나 백화점 같은 전통 유통 기업은 '구시대 유물' 취급을 받는 게 현실이었죠. 그런데 신세계 정용진 회장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250MW(메가와트) 규모의 국내 최대 AI 데이터센터 건립 계획을 발표하면서 판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단순히 마트에 AI 시스템 좀 깔겠다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기업 체질 자체를 AI 인프라 기업으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저는 6년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조직이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는 걸 체감했는데, 이번 신세계의 움직임은 그런 관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선 이유
2026년 3월 1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 상무부 내셔널 AI 센터 개소식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자리는 트럼프 행정부가 2025년 7월 행정명령으로 시작한 AI 수출 프로그램의 공식적인 출발점이었습니다. 여기서 AI 수출 프로그램이란 미국이 자국의 핵심 AI 기술과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패키지로 묶어서 동맹국에 수출하는 전략을 의미합니다(출처: 미국 상무부). 쉽게 말해 미국이 자국의 기술 패권을 동맹국과 나누면서도 주도권은 계속 쥐고 가겠다는 전략입니다.
이 역사적인 자리에 정용진 회장이 직접 참석해서 리플렉션 AI의 미샤 라스킨 CEO와 전략적 파트너십 양해각서(MOU)에 서명했고, 하워드 러드닉 미국 상무부 장관이 직접 참석했습니다. 상무부 장관이 민간 기업의 MOU 체결식에 나타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는 신세계의 이번 프로젝트가 미국 정부 차원에서 공식 승인하고 지원하는 1호 사업임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정용진 회장은 3개월 전인 2025년 12월에 이미 미국으로 날아가 러드닉 장관과 AI 협력을 논의한 바 있습니다. 제가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느끼는 건데, 이런 큰 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3개월 동안의 물밑 작업과 정부 간 조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습니다.
GPU 확보 경쟁과 리플렉션 AI의 역할
250MW라는 전력 용량은 실감이 잘 안 올 수 있는데, 현재 대한민국에 건설 중이거나 계획된 모든 AI 데이터센터를 통틀어도 단일 규모로는 최대 수준입니다. 축구장 수십 개 면적에 해당하는 부지가 필요하고, 막대한 전력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데이터센터의 진짜 심장은 건물이 아니라 GPU(Graphics Processing Unit)입니다. 여기서 GPU란 원래 그래픽 처리를 위해 만들어진 반도체인데, AI 연산에 최적화되어 있어서 현재 AI 산업의 핵심 자원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전 세계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엔비디아 GPU를 확보하기 위해 수십조 원을 들고 줄을 서 있다는 점입니다. 신세계가 이 문제를 해결한 방식이 바로 리플렉션 AI와의 파트너십입니다. 리플렉션 AI는 2024년 설립된 신생 스타트업이지만, 창업자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2016년 이세돌 9단을 이긴 알파고(AlphaGo)의 공동 개발자 이오아니스 안톤글루 CTO와 구글 딥마인드 핵심 개발자 출신 미샤 라스킨 CEO가 주축입니다.
이들의 기술력을 인정받아 창업 1년 반 만에 엔비디아를 포함한 글로벌 투자자들로부터 20억 달러(약 3조 원)의 투자를 유치했고, 기업 가치는 80억 달러(약 12조 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출처: 파이낸셜타임스). 신세계는 리플렉션 AI를 통해 엔비디아 GPU 물량을 확보하는 구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정용진 회장의 전략이 단순히 돈만 쏟아붓는 게 아니라 기술 파트너십을 통해 핵심 자원을 선점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고 느꼈습니다.
리플렉션 AI의 핵심 기술은 오픈 웨이트(Open Weight) AI 모델입니다. 오픈 웨이트란 AI 모델의 가중치(weight)를 공개하여 사용자가 직접 모델을 수정하고 데이터를 통제할 수 있는 방식을 말합니다. 반대로 ChatGPT 같은 서비스는 폐쇄형(Closed Source)이어서 사용자는 모델 내부를 볼 수 없고 모든 데이터가 오픈 AI 서버로 올라갑니다. 정부나 금융기관처럼 민감한 데이터를 다루는 곳에서는 오픈 웨이트 방식이 훨씬 적합합니다. 이를 통해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세계 INC, 실제 수혜는 언제부터인가
시장에 큰 호재가 터지면 초보 투자자들은 뉴스 제목만 보고 매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진짜 수혜주를 가려내려면 사업보고서를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신세계 그룹에서 IT를 담당하는 계열사는 신세계 INC입니다. 이 회사가 정말 이번 AI 데이터센터 사업의 실질적인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체력과 역량을 갖췄는지 세 가지 기준으로 확인했습니다.
첫째, 사업의 실체입니다. 신세계 INC 사업보고서를 보면 주요 제품 및 서비스 항목에 이미 수년 전부터 AI 사업, 통합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수요 예측, 스마트 리테일이 본업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유형자산 파트를 보면 경기도 김포시에 자체 보유한 데이터센터 토지(94억 원)와 건물(586억 원)이 장부에 등재되어 있어서, 총 681억 원 규모의 실물 인프라를 이미 운영 중입니다. 갑자기 AI 한다고 뛰어드는 게 아니라 10년 넘게 인프라를 굴려온 기술 기반이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실제 매출 성장 추이입니다. 2025년 연간 매출 6,872억 원 중 IT 서비스 부문이 4,193억 원으로 61%를 차지하며, 이 부문 매출이 2023년 2,852억 원, 2024년 3,423억 원, 2025년 3,803억 원으로 3년 연속 우상향하고 있습니다. 추가로 IT 유통 부문 매출이 1,972억 원인데, 이는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수적인 서버, 스토리지, 보안 장비 등을 유통하는 사업입니다. 초대형 데이터센터가 지어지면 이 부문에서도 자연스럽게 수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셋째, 재무 체력과 주주 환원 의지입니다. 신세계 INC는 2023년부터 3년 연속 신용등급 'Aa'를 유지하고 있어 국내 기업 중 최상위권입니다. 신용등급이 높으면 수조 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외부 자금을 낮은 비용으로 조달할 수 있고, 파트너사에게도 신뢰를 줄 수 있습니다. 또한 2024년 12월에 193만 주, 2025년 4월에 128만 주를 자기 주식 소각했습니다. 자기 주식 소각(Treasury Stock Retirement)이란 회사가 자체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해서 아예 없애버리는 것으로, 시장에 유통되는 주식 수가 줄어들어 주당 가치가 상승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말로만 주주 친화를 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다만 냉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리스크도 있습니다. 현재 단계는 MOU, 즉 양해각서에 불과합니다. 250MW 데이터센터는 부지 선정, 전력 확보, 인허가, 착공까지 갈 길이 멉니다. 보도에 따르면 착공 목표 시점이 2030년 이전이고, 실제 수익이 발생하는 시점은 2031년 이후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신세계 INC 실적에 반영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GPU 공급 확보도 변수입니다. 리플렉션 AI가 엔비디아에서 공급받기로 했다는 건 긍정적이지만, 실제 물량과 납기는 구체적인 계약이 공개되어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세계 INC가 합작법인(JV)에 직접 참여할지, 단순히 구축·운영 수주를 받는지도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2017~2019년 사이 여러 국내 기업이 해외와 스마트시티, AI 협력 MOU를 발표했다가 실제 착공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례들이 있었기에 진행 상황을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지표는 무엇일까요. 첫째, JV 설립 공식 발표입니다. 연내 합작법인 설립이 목표라고 하니 언제 어떤 구조로 나오는지가 첫 번째 확인 포인트입니다. 둘째, 데이터센터 부지 발표입니다. 부지가 결정되면 착공 일정이 구체화되고 수주 기업이 누구인지 윤곽이 잡힙니다. 셋째, 신세계 INC의 분기 실적과 수주잔고입니다. 현재 수주잔고가 553억 원인데 AI·데이터센터 관련 신규 수주가 잡히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실적 반영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정용진 회장이 이번 승부수를 던진 배경에는 그룹 내부의 절박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2024년 신세계 그룹은 공식적으로 두 쪽으로 쪼개졌습니다. 동생 정유경 회장이 수익성 좋은 백화점 부문을 가져가고, 정용진 회장은 덩치는 크지만 온라인에서 고전 중인 이마트와 SSG닷컴, 지마켓을 떠안았습니다. 계열 분리 이후 오프라인 사업은 회복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마트는 2023년 적자에서 2024년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2025년 상반기 영업이익 1,809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트레이더스도 총매출 3조 8천억 원에 영업이익 1,293억 원을 냈습니다.
하지만 온라인은 여전히 출혈이 심각합니다. SSG닷컴 영업손실 1,178억 원, 지마켓 영업손실 674억 원으로 최근 3년 누적 적자만 4,500억 원을 넘습니다. 쿠팡의 물류망과 네이버의 알고리즘을 사람 몇 명 바꾼다고 따라잡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온라인 문제는 인프라와 알고리즘의 싸움이고, 신세계가 이번에 선택한 길은 자체 AI 인프라를 깔아서 추천 엔진, 물류 최적화, 수요 예측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전략입니다.
역사적으로 아마존도 2010년대 초반까지는 단순 유통 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존은 자체 물류 창고에서 굴리던 IT 인프라를 다른 기업에 판매하기 시작했고, 그게 지금의 AWS(Amazon Web Services)입니다. 현재 아마존 이익의 상당 부분이 AWS에서 나옵니다. 신세계가 같은 길을 갈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통 기업이 데이터와 IT 인프라를 무기로 사업 구조를 바꾸려는 방향성 자체는 이미 검증된 모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신세계의 움직임이 방향성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행 단계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얼마나 많이 생길지, 그리고 그걸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 회사에서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항상 계획이 멋져 보이지만, 막상 실행하면 예산·인력·일정 문제가 끊임없이 터집니다. 데이터센터 같은 초대형 인프라 사업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단계에서 성급하게 "무조건 대박"이라고 보기보다는, 앞으로 JV 설립, 부지 확정, 수주 발표 등의 실질적인 진전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판단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화려한 스토리보다 실제로 돈이 언제부터 벌리는지가 더 중요하니까요.